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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그리고 여행 이야기/영화, 전시, 공연 이야기

지중해 (Mediterraneo, 1991)

1991년 개봉한 이탈리아 영화입니다.

감독은 가브리엘 살바토레.

이 영화는 실화를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2차대전 당시 이런 작은 섬에 소규모 부대를 보냈다가 통신장비가 고장나고 본국도 잊어버려서 지원도 없어져 부대원들이 그 섬에 눌러앉아서 농사짓고 물고기 잡아가면서 한참을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지나가던 영국 어부가 섬에 들어와 전쟁 끝난지 오래라고 알려줘서 비로소 전쟁이 끝난 걸 알게되었고 비로소 독일과 영국이 조사하여 부대원들이 독일로 돌아간 적이 있는데 바로 영국령인 채널 제도에서 독일 국방군이 겪은 실화입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니 주의 부탁드립니다


[ SYNOPSYS ]

 

섬에 상륙하기 직전. 이런 군인같은 모습은 이 장면이 마지막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1년 6월, 이탈리아 왕국군 소대 9명이 그리스에 있는 외딴 섬으로 파병된다.

섬에는 작은 마을이 있지만 사람들은 죄다 피난가서 닭이나 남아있을뿐이고 당연히 전투 같은 것은 벌어지지 않고 그저 대기하고 있던 와중에 그날 밤, 이들을 섬으로 태워준 상륙함이 영국 잠수함에 의해 격침되고 만다.무전을 해도 배에서 받지 않고, 상부에선 이들 전부 바다에 수장한 것으로 알고 잊어버리게 된다. 이런 가운데 불안한 일행들은 섬으로 올때 물품을 운반할 용도로 데려온 당나귀를 실수로 죽이고 당나귀를 아끼던 사병 스트라자보스코가 흥분하여 싸우던 도중 무전기를 내던지는 통에 무전기까지 고장나서 바깥으로 연락도 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중에 마을 사람들이 돌아오는데, 늙은이들과 여자와 아이들 뿐이었고, 이탈리아어를 아는 마을 정교회 신부에게 물어보니 독일군이 주둔한 적이 있는데 그 때,남자들을 다 끌고 갔다고 한다. 주인공 일행이 왔을때 독일군이 다시 온 줄 알고 도망쳤지만, 이탈리아군이란 걸 알고 돌아왔다고.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형제라는 신부의 황당한 말을 반갑게 받아들인 일행은 담담히 섬생활을 시작한다. 처음엔 순찰도 돌고 하다가 다들 죄다 풀려서 어렵게 농사도 짓고 닭도 잡아먹으면서 지루하지만 평화스럽게 세월을 보낸다. 마을 사람들과는 아직 서먹서먹하여 따로 떨어져 살긴 하지만.

그러다 지나가던 튀르키예인 밀매상이 찾아와서 배를 빼앗고자 했으나 문득 나가봐야 전선에 또 갈뿐이니 이들은 지겨운 전쟁이 싫어서 그냥 포기한다.

 
 

군인이기 보다는 이제는 마을 주민들이 된 부대원들

다만 일행 중 코라도라는 사병 홀로만 이탈리아로 가고 싶어 그만은 이 배를 빼앗자고 열심히 건의하지만, 선거 결과 다수결로 남자는 의견이 나왔기 때문에 소대장인 몬티니 중위는 거부한데다 처음에는 전선으로 가야 한다던 부소대장까지 밀매상이 가져온 아편에 정신이 팔린 사이, 밀매상은 일행의 무기와 시계, 현금, 귀중품 등 싸그리 훔쳐가버린다. 이때 배에 숨어 있던 코라도는 자신도 데려가 달라고 하지만 밀매상이 바다에 빠트려 버린다.

아무튼 무기를 몽땅 털리고 망연자실해 하는 일행에게 신부가 그리스인답게 '그러게 터키인을 왜 믿었냐'며 비웃는다. 그리고 무기 걱정을 하는 주인공들에게 독일군 몰래 숨겨둔 무기들을 보여준다.

독일군 복장과 무기로 재정비해보지만 군인의 모습은 이제 사라져버렸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들은 마을 사람들과 차츰 정도 나누고 마을에서 머물면서 사람들 일도 돕고 아예 마을 사람이 되어버린다. 당연히 군복도 총도 내팽개치고 수류탄은 물고기 잡는데 쓰인다. 고장난 무전기는 아예 새집이 되었다. 다만 오로지 코라도 1명만 조국으로 돌아가고 싶어 안달일뿐.

 

바실리사와의 즐거운 한 때

마을에서 살면서 전쟁도 뭐도 다 잊고 평화롭게 살아가며 일행 중 유일한 고아인 병사 파리나는 마을에서 매춘일을 하며 살아가던 여성 바실리사와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나중에는 동료인 콜라산티가 손님으로 찾아오자 경고 사격을 하는데 이제 그녀는 창녀같은게 아니니 그녀 건드리면 나에게 죽는다고 으르렁거린다.

파리나 때문에 바실리사에게 가지 못해서 심각해진 부대원들

걸음아 나 살려라 달아난 부대원이 소대장인 몬티니 중위에게 찾아와 어찌해보라고 하고, 중위가 찾아가자 "그녀를 창녀라고 한다면 아무리 소대장님이라고 해도 용서못한다."고 으르렁거리는 통에 겨우 그를 진성시킨다. 그리고 여러 사정을 듣던 신부의 중재로 둘은 나중에 신부의 주례로 결혼식을 치른다.

전쟁속의 평화와 매춘속의 사랑의 대비

그러던 어느 날, 이들과 마을 사람들이 어울려 신나게 축구를 하고 있던 중에 소형 비행기 1대가 불시착한다. 비행기 조종사는 바로 이탈리아인. 섬에 잠깐 머물면서 비행기를 고치던 그 조종사에게 군인들은 이탈리아 본국에 대하여 이거저거 질문하는데 조종사는 뭐 이런 사람들이 있냐며 마구 웃는다. 이미 두체 무솔리니는 축출된 지 오래이며 자국민들이 파르티잔이 되어 파시즘에 맞서 싸우는데다가 전쟁은 끝나서 영국, 미국과 한편이 된 지 오래되었다는 것. 비행기를 고치고 그는 떠나는데 또 비행기에 몰래 숨어타던 코라도는 들켜서 조종사에게 내쫓겨난다.

 
 

즐겁게 노는 도중 비행기가 불시착하는 장면

조종사가 다녀가고도 일행의 생활에는 딱히 큰 변화가 없다. 그런데 여느날처럼 허탈하게 해변으로 나와 수류탄으로 고기를 잡던 코라도가 마을 사람들이 숨겨놓은 보트를 발견, 파리나와 바실리사가 결혼하던 날에 얼씨구 좋다 하면서 배를 타고 섬을 탈출한다.

코라도가 찔렀는지 몰라도 얼마 후 섬에 영국 해군이 찾아오고, 독일군에 끌려갔던 마을 남정네들도 돌아온다. 그리고 나머지 일행도 이제 이탈리아로 돌아가자며 마음을 먹고 있는데 파리나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아무리 찾아도 파리나가 보이지 않자, 문득 뭔가가 생각난 부소대장이자 부사관인 니콜라가 간 곳은 마을 공용 창고. 거기서 여기저기를 찾아보니 빈 올리브통에 파리나가 숨어있었다. 왜 여기 있냐는 말에 "난 이탈리아로 가봐야 기다리는 사람도 없어요, 하지만 여기에는 내가 사랑하는 아내가 있습니다. 그녀를 버리고 가라고요? 이젠, 여기가 내 고향이고 내가 살아갈 곳입니다! 절대로 이탈리아에는 안 가겠어요!" 라고 따져든다.

 

결국 그를 놔두고 나머지 7명은 이탈리아로 가게 된다.

그리고 세월이 지난다.

40여년이 지나서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되었으며, 이제 아무리 봐도 70대 할아버지가 된 몬티니가 이 섬으로 돌아온다.

내 인생에서 이 섬에서 지내던 그 몇년처럼 행복하던 시절이 없었다면서 이제 얼마 살지도 못하는 삶, 여기서 죽고 싶다고 중얼거리며 섬으로 돌아온다. 40여년이나 지나 세계적인 관광지가 된 섬은 많이 달라졌지만 그래도 옛날 흔적 여기저기가 곳곳에 남아서 섬 여기저기를 둘러보며 그는 회한에 젖는다. 그러다가, 성당을 둘러보다가 그 쪽에 있는 마을 공동묘지를 보고 깜짝 놀라는데 바로 바실리사 사진이 있는 무덤이었다. 착잡한 얼굴을 하며 잠깐 명복을 빌던 몬티니는 사람들에게 물어보는데 아직도 파리나는 살아서 마을에서 작은 이탈리아 식당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그가 운영하는 식당에 오니 한 노인이 음식 만들 준비를 바쁘게 하고 있었다. 반갑게 들어가서 이름을 부르자 놀란 그 노인이 고개를 들고보니 역시나 할아버지가 된 파리나였다. 잠깐 누군지 몰라하다가 소대장님? 이라고 기억한 파리나에게 몬티니는 반갑게 회포를 풀고 식당을 둘러보다가 놀라는데 이미 식당에는 부소대장인 니콜라가 있었다. 니콜라도 처음에는 누군지 몰라보다가 몬티니를 알아보는데 니콜라도 이미 몬티니랑 똑같이 이 섬에서 늘그막을 지내고자 찾아와 파리나의 식당에서 일하면서 같이 살고 있었던 것. 몬티니도 일거리를 달라고 하면서 나도 여기서 살고 싶다고 하면서 셋이서 가벼운 술자리를 나누며 영화는 끝나게 된다.

[ REVIEW ]

1992년 아카데미에서 최우수 외국어영화상을 수상했다. 이 '지중해' 영화에 대한 다양한 비평과 해석이 있다. 대부분 전쟁과 대비되는 평화, 소소한 일상의 중요함, 아름다운 지중해에 가고 싶다는 식으로 이 영화를 해석한다. 물론 감독이 그렇게 의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난 이 영화를 보면서 '회피'를 떠올렸다.

[ KEYWORD ]

회피

'회피'하면 부정적인 뉘앙스를 가진 단어지만, 때로는 맞부딪히는 것보다 회피가 더 현명할 때가 있는 법. '회피'의 대명사는 독일의 소설가인 '파트리크 쥐스퀸트'라고 봐도 무방하다. 우리에겐 '향수'라는 소설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의 작품 중 최고는 '비둘기'와 '콘트라베이스'다.

파트리크 쥐스퀸트

'쥐스퀸트'가 그의 작품들 속에서 얘기하고 싶은 주제는 '회피'다. 실제로 그는 문학상 시상식에도 나오지 않고 기자들과 인터뷰를 삼가하고 사진찍히는 것도 싫어한다.

지중해 영화 촬영 중

마찬가지로, 이 섬에 들어온 이탈리아 군인들은 영화 내내 자신들의 본분이 군인이라는 것을 일깨워주는 여러가지 에피소드들과 마주하지만 애써 고개를 돌려버린다. '회피'다.

똥이 무서워서 피하냐? 더러워서 피하지!

전형적인 '회피' 속담이다. 전쟁이라는 상황은 인간성이 말살되는 시기이며, 기껏 쌓아올린 모든 문화와 문명이 사라지는 엄혹한 시기다. 이런 상황에서 한 인간이 또는 일단의 인간 군상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게 무엇일까?

'회피' 뿐이다. 자신의 총으로 상대방을 죽인 것에 대해 가지는 죄책감을 '회피'하고, 동료의 죽음을 '회피'하고 적을 향해 돌진하고, 위정자들의 놀음에 불과한 전쟁에 애써 애국이란 개념을 가져다 정당성을 부여하면서 자신의 나약함을 '회피'하는 것. 그게 전쟁이다.

영화 '지중해'는 전쟁이라는 악마적인 상황을 벗어나 천국과 같은 섬에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인간들의 이야기가 아니다. 엄연히 계급이 있고, 돌아가야할 조국이 있다. 밀매상이 배를 타고 왔을 때 배를 타고 돌아갈 수 있었다. 군복 등 대부분을 밀수상에게 도둑맞았지만, 독일군복과 무기로 무장도 했다. 심지어 비행기가 불시착해서 전쟁이 끝났음을 알려줘도 돌아가지 않는다. 왜냐면 여전히 조국은 파시즘에 맞서 내전중이었기 때문이다. 철저한 '회피'다.

'전쟁에서 비켜나간 섬에서 평화롭게 본분을 잊고 살아가는 부대원들의 이야기' 쯤으로 이 영화를 보기에는 너무 아까운 영화다.

전쟁으로부터의 '회피', 계급으로부터의 '회피', 더 나아가 국가로부터의 '회피'를 이 영화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영화 첫 시작부분에 이탈리아어로 이런 자막이 흐른다.

"Dedicato a tutti quelli che stanno scappando"

"도피하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바친다."

지중해 DVD 표지

[ BACK STORY ]

  • 시네마 천국과 더불어 1980년대에 몰락해 가던 이탈리아 영화 산업을 다시 일으켜 세운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 이들을 섬으로 태워준 상륙함이 R.N. 가리발디함인데, 이 함명은 실제로 있었으나 상륙함이 아니라 콘도티에리급 경순양함의 함명으로 사용되었다. 이 함선은 격침되지 않고 공화국 시절까지 별 사고 없이 운용되었다.
  • 이탈리아와 그리스는 형제라는 신부의 말은 사실이다. 그리스인들이 고대에 이탈리아에 식민도시를 운영했고, 로마도 그리스를 정복하면서 그리스로부터 종교, 문화, 스포츠 등 다방면에 있어서 영향을 받았으며, 나중에는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하면서, 그리스인들도 스스로를 로마인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 아편밀매상이 처음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튀르키예와 그리스는 형제!'라는 말을 했다가, 주인공 일행이 '우린 이탈리아 사람이야.'라고 하니까 한동안 말이 없다가 '튀르키예와 이탈리아는 형제!'라고 한다. 참고로 터키와 그리스의 사이는 한국과 일본 사이와 비슷하다. 즉, 일본 밀매상이 한국에 찾아와서 '한국과 일본은 형제!'라고 한거라고 보면 된다.
  • 코라도라는 사병 홀로만 이탈리아로 가고 싶어하는데 그 이유는 고향에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어서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도 섬에 오기 전에 탈영을 일삼던 상습범이었다. 때문에 마누라에게 꾸준히 편지를 썼지만 다 귀찮았던 부소대장이 배송요청을 싹다 씹어버린다. 근데 동료들과 섬에 있는 유일한 매춘부인 바실리사를 찾아가는 것은 빠지지 않았다.
  • 마을에서 매춘일을 하며 살아가던 바실리사는 이곳 섬 출신은 아니고 독일군들이 데려온 매춘부다. 왜 매춘부가 되었냐고 파리나가 묻자 그녀 왈, "엄마도 매춘부였고, 할매도 매춘부였고, 그 위에 할매도..."라고 하는 대사가 있다.